SUWON
수원
水原 · 경기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찾아가려고 성을 두르고 읍을 옮긴 계획도시입니다.
이름의 유래
수원은 고려의 수주(水州)를 조선 태종 때 고친 이름입니다.
통설
인주가 인천이 된 것과 같은 1413년 무렵의 개편으로, 수주가 수원이 되었다는 설명이 통설입니다. 한자 그대로는 ‘물의 근원’입니다. 그 글자 뜻을 마을의 우물 하나로 특정하는 민간 이야기는 개명 기록보다 후대입니다.
다른 설
화성(華城)은 수원 고을 전체의 옛 이름이 아닙니다. 정조가 새로 쌓은 성과 그 도시 구역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수원과 화성을 처음부터 같은 말로 쓰지 않습니다.
어떻게 선 고을인가
조선 전기의 수원은 한양 남쪽의 평범한 고을이었습니다. 도읍도, 백제의 수도도 아닙니다. 이름이 전국에 커진 것은 18세기 정조 때입니다.
사도세자가 1762년 죽은 뒤, 그의 아들 정조는 아버지 무덤을 수원 쪽으로 옮기고 그 자리를 자주 찾으려 합니다. 무덤의 이름은 현륭원, 뒤에 융릉으로 높여 부릅니다.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고 1794년부터 화성을 쌓습니다. 대체로 1796년에 성곽의 뼈대가 갖추어진 것으로 이야기됩니다.
누가 다스렸나
화성 유수(留守)는 정조가 둔 특별한 지방관입니다. 보통 군수보다 격이 높고, 한양의 장용영과 연결된 군사 기능도 있었습니다. 효심만의 성이 아니라 정치·군사 도시였습니다.
정조가 1800년 죽은 뒤 화성의 정치적 무게는 줄어듭니다. 성이 남은 것과, 그 성이 계속 나라의 중심이었던 것은 다릅니다.
길목의 사건
화성 축성
정약용이 설계에 관여하고, 거중기 같은 기구를 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벽돌과 석성을 섞고, 공심돈처럼 조선의 다른 읍성에서 잘 안 보이던 시설을 넣었습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습니다. 등재는 현대의 일이라 정조의 업적 목록에 넣지 않습니다.
현륭원 행차
정조는 한양에서 화성을 찾는 능행을 여러 번 했습니다. 행렬은 효도의 의례이면서 왕실의 군사력을 보이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사도」는 그 아버지와 아들의 죽음을 다루지, 화성 공사 현장을 재연하지는 않습니다.
문화 메모
행궁은 왕이 머무는 임시 궁궐입니다. 경복궁의 축소판으로만 보면, 능행이라는 목적이 빠집니다.
오늘의 수원 갈비는 20세기의 음식 문화입니다. 화성 축성과 같은 문단에 넣지 않습니다.
관련 영화
아래 작품은 극입니다. 분위기를 잡는 데는 도움이 되고, 사실 관계의 교과서는 아닙니다. 불법 영상 링크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