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TES
한양도성과 사대문
궁이 도읍의 집이라면 성은 그 집의 울타리입니다. 큰문 넷과 작은문 넷, 그리고 한가운데 종각입니다. 궁의 이야기는 고궁·사대문에 있습니다.
한양도성
HANYANGDOSEONG · 1396
한양도성은 조선의 도읍 한성부의 경계입니다. 태조 5년, 1396년에 북악산·낙산·남산(목멱산)·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쌓기 시작합니다. 음력 1월과 8월, 두 차례 합쳐 98일 동안 전국에서 온 백성이 쌓았다고 서울 한양도성 안내는 적습니다. 평지는 흙, 산지는 돌이었습니다. 길이는 약 18.6킬로미터입니다.
세종 4년(1422)에는 평지의 흙성을 돌로 고쳐 쌓습니다. 숙종 때(1704년부터)는 무너진 구간을 규격 잡힌 돌로 다시 쌓습니다. 순조 때도 보수가 이어집니다. 성돌에 구간 이름과 맡은 고을을 새긴 것이 남아, 어느 층의 돌인지 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1899년 전차가 성문 안팎을 잇자 문은 여닫는 기능을 잃습니다. 1907년 숭례문 좌우 성벽이 헐리고, 1908년에는 평지 성벽의 대부분이 없어집니다. 일제는 남산 조선신궁과 동대문 옆 운동장을 지으며 성돌을 빼 갔습니다. 해방 뒤에도 길과 집이 성을 잘랐습니다.
지금 걷는 순성길은 그 벽의 남은 구간입니다. 서울시 기준으로 2023년에는 전체의 약 70퍼센트, 13.7킬로미터가 남아 있거나 다시 쌓여 있습니다. 1968년 이후의 중건 구간은 옛 돌과 새 돌이 섞여 있습니다. 세계유산으로 확정된 목록은 아닙니다. 등재 추진은 계획으로만 적습니다.
성문을 여닫는 시각은 종로 보신각의 종이 알렸습니다. 저녁 종은 인정, 새벽 종은 파루입니다. 도성 안 사람의 대문도 그 소리를 따랐습니다. 청계천은 성 동쪽의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으로 물을 뺐습니다. 물길의 문이지 사람의 사대문은 아닙니다.
인 · 의 · 예 · 지, 그리고 신
사대문의 이름은 유교의 네 덕을 동서남북에 나누어 넣었습니다. 동은 인(仁), 서는 의(義), 남은 예(禮), 북은 지(智)입니다. 한가운데의 다섯째 덕 신(信)은 문이 아니라 보신각의 종에 두었다는 것이 도읍 계획의 통설입니다. 성문 이름과 민간의 남대문·동대문·서대문·북대문은 같은 문의 다른 층입니다.
사대문
SUNGNYEMUN · 남 · 예(禮)
숭례문남대문
崇禮門 · 2008년 화재 뒤 2013년 복구
남쪽 큰문입니다. 숭(崇)은 높인다, 예(禮)는 예입니다. 예를 높이자는 이름이고, 남쪽에 예를 둔 배치입니다. 1396년 도성과 함께 세우기 시작해 문루는 1398년(태조 7년)에 준공됩니다. 세종 때(1448년 개수)와 성종 때(1479년)에도 크게 고쳤습니다. 상량문에서 확인된 중수입니다.
현판을 세로로 쓴 것은, 남쪽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른다는 풍수 설명으로 전해집니다. 다른 문의 현판은 가로입니다. 풍수 설명은 이름 뜻과 별개의 전승이라, 사실의 연도와 같은 칸에 두지 않습니다.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2층 문루의 대부분이 탑니다. 돌로 쌓은 기단은 남았습니다. 복구는 2010년에 본격화되어 2013년 5월 4일 준공식 뒤 다시 열렸습니다. 문화재 당국은 없어진 문을 새로 만든 복원이 아니라, 남은 부재를 살린 복구로 규정했습니다. 국보 지위는 복구 뒤에도 남아 있습니다.
1907년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문 좌우 성벽이 먼저 헐렸습니다. 2013년 복구 때 문 옆으로 성벽 일부를 다시 이었습니다. 지금 문은 도성 남쪽 벽에 다시 붙어 있습니다.
HEUNGINJIMUN · 동 · 인(仁)
흥인지문동대문
興仁之門 · 문루는 1869년 중건. 옹성이 있음
동쪽 큰문입니다. 흥(興)은 일어나다, 인(仁)은 어질다입니다. 다른 대문이 덕목 두 글자인 것과 달리 지(之)가 하나 더 있습니다. 동쪽 지세가 약하다 하여 글자를 보탰다는 설명이 통설로 전해집니다. 그 글자를 넣은 해를 기록마다 달리 말하기에, 여기서는 해로 못 박지 않습니다. 1396년 완공 명단에 이미 흥인지문으로 적는 역사 안내도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문루는 1869년(고종 6년)에 다시 지은 층이 큽니다. 문 앞에 반달형 옹성이 남아 있습니다. 옹성은 문이 정면으로 바로 뚫리지 않게 한 겹을 두른 벽입니다. 사대문 가운데 옹성이 남아 있는 것은 이 문입니다.
일제는 문 옆에 경성운동장을 지으며 주변 성벽을 헐었습니다. 그 자리의 뒤를 이은 시설이 오늘의 동대문설계플라자 일대입니다. 문은 서 있고, 좌우의 성은 끊겨 있습니다. 청계천으로 나가던 오간수문도 이 동쪽 벽에 있었습니다.
DONUIMUN · 서 · 의(義)
돈의문서대문
敦義門 · 1915년 철거. 실물 없음
서쪽 큰문입니다. 돈(敦)은 도탑다, 의(義)는 옳다입니다. 도탑게 의를 지키자는 이름입니다. 1396년 도성과 함께 둔 문이고, 세종 때 성을 돌로 고치며 문도 다시 손보았습니다. 태종 때 한동안 문을 닫고 다른 서쪽 문(서전문)을 썼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오늘의 빈자리는 정동사거리, 강북삼성병원 앞쪽으로 추정합니다.
1915년 일제가 도로와 전차 궤도를 넓힌다며 문을 헐고 자재로 팔았습니다. 사대문 가운데 실물이 없는 문입니다. 2019년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그 자리에서 증강현실로 문루를 비추는 디지털 복원을 공개했습니다. 돈의문박물관마을 체험관도 그때 함께 열렸습니다. 디지털 복원은 문이 다시 섰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물 복원은 여러 번 말해지다 도로와 비용 때문에 멈췄습니다. 2023–2024년 서울시 구상에는 새문안로를 지하에 넣고 위에 문을 세우자는 안이 있으나, 시 스스로 확정된 공사가 아니라고 밝힌 검토입니다. 끝나는 해를 여기 적지 않습니다. 2026년에도 박물관마을 터를 어떻게 할지는 분쟁 중이라, 빈 터의 상태를 한 문장으로 고정하지 않습니다.
SUKJEONGMUN · 북 · 지(智)
숙정문북대문
肅靖門 · 북악산 능선. 문루는 뒤에 다시 세움
북쪽 큰문입니다. 숙(肅)은 엄숙하다, 정(靖)은 고요하다는 뜻으로 풀립니다. 1396년 기록에는 숙청문(肅淸門)으로도 적힙니다. 뒤에 숙정문이 됩니다. 개명 해를 하나로 못 박지 않습니다. 북악산 능선에 있어 한양 사람들이 매일 드나드는 문이 아니었습니다.
평소 닫아 둔 이유가 기록의 관심입니다. 북쪽은 음의 방위라, 문을 열면 음기가 새고 가뭄이 든다는 풍수가 조정의 설명이었습니다. 가뭄이 들면 숙정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기우가 있었습니다. 산길이기도 해서 곡식과 사람의 일상 문은 남문과 동문이 맡았습니다. 풍수와 지형이 같이 있습니다. 어느 하나만으로 쓰면 반입니다.
문루는 허물어진 뒤 1970년대 한양도성 중건 때 다시 세웠습니다. 광희문·혜화문과 달리 서울시 안내는 숙정문을 원래 자리에 중건한 문으로 둡니다. 1·21 사태 직후인 1968년부터 이 북쪽 구간 보수가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청와대와 북악 통제로 오래 못 걷던 순성길도, 지금은 개방된 날이 있습니다. 개방 요일은 바뀌므로 적지 않습니다.
사소문
큰문 사이의 작은문입니다. 덕목을 동서남북에 나누는 이름은 사대문의 것이고, 소문은 길이의 문입니다.
HYEHWAMUN · 동북 · 소문
혜화문동소문
惠化門 · 1928년 철거 뒤 다시 세움. 자리가 비킴
동북쪽 작은문입니다. 혜(惠)는 은혜, 화(化)는 교화입니다. 처음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습니다. 창경궁 정문도 홍화문이라, 1511년(중종 6년) 성문 이름을 혜화문으로 바꿉니다. 의정부와 포천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1928년 고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문루가 헐립니다. 뒤에 다시 세웠으나 서울 한양도성 안내대로 원래 자리에서 비켜 있습니다. 성벽 산책의 동쪽 북쪽 끝에서 만납니다.
GWANGHUIMUN · 동남 · 소문
광희문시구문 · 수구문
光熙門 · 1915년 문루 붕괴 뒤 다시 세움. 자리가 비킴
동남쪽 작은문입니다. 광(光)은 빛, 희(熙)는 빛나다입니다. 민간에서는 시구문 또는 수구문이라 불렀습니다. 시신을 성 밖으로 내보내던 문이라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은 도성 안에 묻지 않았으므로, 이 문이 삶과 죽음의 경계였습니다.
1915년 문루가 무너집니다. 뒤에 다시 세웠으나 도로 때문에 원래 자리에서 비켜 있습니다. 남산 동쪽 자락의 성벽과 이어 읽으면, 왜 이 문이 남문과 따로 있었는지가 보입니다.
SOUIMUN · 서남 · 소문
소의문서소문
昭義門 · 1914년 철거. 실물 없음
서남쪽 작은문입니다. 소(昭)는 밝다, 의(義)는 옳다입니다. 처음 이름은 소덕문이고, 뒤에 소의문이 됩니다. 민간 이름은 서소문입니다. 1396년의 소문이고, 1914년에 헐렸습니다. 돈의문보다 한 해 이릅니다. 다시 세우지 않았습니다.
문 밖 네거리는 조선의 처형장이었습니다. 19세기 천주교 신자들이 죽은 자리로도 남아, 지금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 그 층을 알려 줍니다. 문은 없고 기억의 장소가 있습니다. 서대문인 돈의문과 서소문인 소의문을 한 문으로 부르면 둘 다 틀립니다.
CHANGUIMUN · 서북 · 소문
창의문자하문
彰義門 · 조선의 문루가 남아 있음
서북쪽 작은문입니다. 창(彰)은 드러내다, 의(義)는 옳다입니다. 자하문은 널리 부른 다른 이름이고, 자하(紫霞)는 자주빛 노을이라는 산의 말입니다.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고개에 있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왔다는 일이 이 문의 역사로 자주 남습니다. 작은문 가운데 조선 때 문루의 뼈대가 가장 잘 남아 있습니다. 돈의문·소의문처럼 일제가 통째로 없애지는 않았습니다. 북악 순성길이 이 문에서 숙정문 쪽으로 이어집니다.
보신각
BOSINGAK · 신(信)
보신각은 사대문이 아닙니다. 종로의 종각입니다. 보(普)는 두루, 신(信)은 믿음입니다. 도읍의 다섯 덕에서 가운데 신(信)을 이 종에 두었다는 통설이, 인·의·예·지 네 문과 짝을 이룹니다.
지금 종각은 원래 자리에서 조금 옮겨 다시 세운 건물입니다. 조선의 종 그대로는 아닙니다. 문 이름을 외울 때 다섯째 칸으로만 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