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YEO
부여
扶餘 · 충청도
백제가 538년 사비로 천도하며 남부여라 부른 마지막 수도입니다. 660년에 멸망합니다.
이름의 유래
사비는 백제 때의 이름이고, 부여는 나라의 계승 의식을 담아 뒤에 자리 잡은 이름입니다.
통설
성왕이 538년 웅진에서 사비(泗沘)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했습니다. 북쪽의 부여에서 나왔다는 계승 의식입니다. 신라 경덕왕 때의 한화 정책 이후 이 고을이 부여로 적힌다는 설명이 통설입니다.
다른 설
사비라는 말의 우리말 어원은 여러 설이 있고 하나로 닫히지 않았습니다. ‘부소산 아래 강’ 같은 풍경 설명은 위치를 돕는 말이지, 음운을 푼 통설은 아닙니다.
어떻게 선 고을인가
사비 천도는 수도를 금강 하류의 넓은 쪽으로 옮긴 일입니다. 성왕은 신라와 손잡고 한강을 되찾으려 했으나, 554년 관산성에서 신라군에게 죽습니다. 사비 시대는 화려한 시작과 함께 그 배신이 기록된 시대입니다.
의자왕 때인 660년, 신라 김유신·김춘추와 당나라 소정방의 군이 사비를 칩니다. 계백은 그 전에 황산벌에서 막습니다.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은 당으로 끌려갑니다. 백제의 왕조는 여기서 끝납니다. 복국 운동이 잠깐 이어지지만 나라를 되돌리지는 못합니다.
누가 다스렸나
사비의 왕은 성왕 이후 의자왕까지입니다. 부소산 아래 왕궁 터와 관북리 일대가 궁궐 구역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건물 하나를 어느 왕의 침전이라고 단정하는 안내판은 조심해서 읽습니다.
멸망 뒤 부여는 신라·고려·조선의 군현입니다. 백제 왕실이 여기 남아 지방 정권을 이은 것은 아닙니다.
길목의 사건
관산성, 554년
성왕이 신라를 치러 갔다가 죽습니다. 장소는 오늘의 옥천 일대로 봅니다. 사비 천도 16년 만의 일입니다. 백제의 한강 회복은 실패합니다.
사비 함락, 660년
황산벌은 부여 바로 안쪽이 아니라 오늘의 논산 쪽입니다. 그 싸움이 무너진 뒤 수도가 열립니다.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전설입니다. 멸망의 사실과 그 설화는 구분합니다.
문화 메모
백제 금동대향로는 능산리 절터 근처에서 출토된 공예품입니다. 사비 시대의 금속 공예가 어떤 수준이었는지 보여 줍니다. 어느 왕비의 개인 물건인지는 명문이 없습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사비에 남은 석탑입니다. 부여에 서 있는 석물이 모두 백제 것은 아니고, 조선의 읍치 시설도 겹쳐 있습니다.
관련 영화
아래 작품은 극입니다. 분위기를 잡는 데는 도움이 되고, 사실 관계의 교과서는 아닙니다. 불법 영상 링크는 없습니다.